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해/역사귀속과 계승인식 (문단 편집) ===== 고려 ===== 발해 멸망 이후 태자 [[대광현]] 외 대화균, 대균로, 대원균, 대복모, 신덕, 대심리, [[박어]] 등 다수의 발해 관료와 수만의 발해 백성이 [[발해유민|고려에 귀부]]하였으며, 고려는 그들을 우대하여 조상들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주었고, 대광현에게는 왕씨를 사성하고 새로 이름을 하사하여 왕계(王繼)[* '이어질 계'자이다.]라는 새 이름으로 살게 하였다. 일각에서는 대광현의 투항을 두고 고려가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의 유민을 적극 포용한 결과로 해석한다. 왕건이 거란의 사신을 유배보낸 [[만부교 사건]]를 봐도 초기 고려가 발해를 기본적으로 우호 국가로 인식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만부교 사건 자체가 고려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던 거란의 사신을 유배보낸, 상당한 외교결례이기 때문이다. 왕건이 이런 외교결례를 저지른 데에는 거란이 발해 멸망의 원흉이라는 점이 주된 동기라는 게 지배적인 해석이다. 왕건 본인이 발해에 얼마만큼의 애착이 있었는지야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은 제스쳐가 고려가 흡수한 발해 유민들을 위한 정치적 퍼포먼스라는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고려 시대에는 발해에 대해 계승·동류 의식을 표방한 바가 전혀 없다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야 자국의 역사 체계에 편입시켰다거나, 고려가 고구려 계승을 천명했기 때문에 발해의 존재를 부담스러워 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낭설일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 내에서도 발해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져갔고 그로 인해 발해에 대한 기록이 매우 부족해져 버렸기 때문에, 유득공은 이를 두고 고려가 발해사를 홀대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려 이전의 왕조들에 대한 일종의 통사로서 작성된 기이(紀異) 편에서 발해를 다루고 있으며, 이승휴의 역사 서사시 《[[제왕운기]]》에서도 한국사를 다룬 하권에 후백제 다음에 발해를 언급함으로써 자국의 역사임을 분명히 했다. 고려의 시조인 왕건부터 발해를 두고 "본디 우리 친척 나라[本吾親戚之國]"[* [[http://db.history.go.kr/id/ko_038_1480_0010|(開運二年(945) 十月) 初, 高麗王建用兵呑滅鄰國,]]]라고 언급한 적도 있다. 이를 두고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고려 왕실이 발해와 혼인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김창겸, 後三國 統一期 太祖 王建의 浿西豪族과 渤海遺民에 대한 政策硏究, 성대사림, 성균관대학교사학회, 1987.] 일반적으로 그 발언은 고려가 발해와 더불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동류 의식을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윤관]]의 아들인 [[윤언이]]가 자신이 과거에 주장한 [[칭제건원]] 건의의 정당성을 역설하면서 내세운 '전례'에도, 고려 국초인 [[태조(고려)|태조]]·[[광종(고려)|광종]]대의 사례, 신라의 사례에 더하여 발해의 사례를 들은 것[* 繄是立元之請, 本乎尊主之誠, 在我本朝, 有太袓·光宗之故事. 稽其往牒, 雖新羅·渤海以得爲, 大國未嘗加其兵, 小國無敢議其失.] 역시 고려가 발해를 자국의 전대사(前代史)로 인식했다는 증거가 될 만하다. 다만 1300년을 전후한 시기의 인물인 [[충선왕]]과 [[이제현]]이 만부교 사건에 대해 그 역사적 배경을 잘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면, 고려의 발해 계승 의식은 후대로 갈수록 희미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고려가 삼국의 고토는 계승한 반면 발해의 중심 지역인 동만주 지역을 끝내 영유하지 못하기도 했고 남하한 발해인 집단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고려 사회에 동화되었기에[* 애시당초 발해라는 국호 자체가 당나라나 신라와의 외교가 원할하게 하기 위한 국호라는 설이 유력하고, 일본과의 교역에서는 발해의 왕들이 고려국왕을 자처했다. 같은 고구려의 계승국이므로 쉽게 동화되는 건 당연지사.] 고려인의 의식 세계에서 발해의 존재감이 점차 약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발해가 일찍 멸망한 탓에, 발해와 고려의 외교관계는 제대로 수립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만약 두 나라가 꽤 오랫동안 공존했다면 어떠한 관계를 형성했을지는 추측하기가 쉽지 않다. 왕건은 고구려 계승국이라는 이유로 발해에 친근감을 드러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했을 수도 있다. 신라에서 갈라져 나온 후삼국이나, 서로 부여의 후손임을 자처했던 고구려·백제의 상호 항쟁을 보면 그랬을만도 하다. 하지만 요·금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손을 잡았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아무튼 고려가 고구려 계승 문제 때문에 발해를 내심 경원시했다는 문헌적 증거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발해를 멸한 요나라 사신들이 보내온 낙타를 굶겨 죽일 정도로 발해에 대한 동족의식이 있었다. 예를 들면 거란을 금수의 나라[* 이런 표현은 아무리 거란을 고려의 입장에서 야만적인 오랑캐의 나라라고 보아도 과한 표현으로 이는 형제국 발해를 멸망시킨 것에 대한 경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로 본 [[훈요10조]]가 그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